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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의 힘
역사속 오늘

8월14일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by 죽은척하기 2022. 8. 14.
고 김학순 할머니


전쟁터에서 성을 목적으로 여성을 착취해온 일은 역사가 길었다.

일본은 전쟁터의 점령지에서 일어나는 병사들의 강간과 약탈을 예방하고 병사들의 성병감염을 막을 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했다. 처음엔 본토에서 매춘부로 일하는 일본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전선이 확대되고 그 수가 부족해지자 식민지의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공장에 취업시켜 주겠다는 거짓말로 꾀어 위안부로 끌고갔다.
중국, 일본, 남태평양, 동남아시아로 태평양 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었고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알지도 못하는 땅에서 하루에 10여명, 많을때는 30여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는 성노예가 되었다.
성매매의 댓가로 일본군이 낸 이용료가 있긴 했지만 그 돈이 그녀들에게 전달 될 리 없었다.

성병에 걸리거나 혹여 임신이라도 되면 위안소에서 추방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 타국당에서 추방당한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맞아죽고, 도망가다 붙들려 죽고, 병에 걸려 죽고 추방당해 죽는 세월이 이어졌다. 죽지 않은 여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집단 성폭행에 시달리며 죽음같은 하루를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그녀들은 또한번 죽음의 문턱에 서야했다. 일본군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집단으로 학살한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여인들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들은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인 ‘환향녀’와 같은 운명이었다. 고향에 소식을 전하지 않고 숨죽이며 숨어 지내야 살 수 있었다. 피해자였지만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오히려 그녀들이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 되었지만 일본정부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일’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았다.
1990년 6월,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나 군의 관여는 전혀 없었다. 피해자의 명단도, 단서도 없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1991년 8월14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한 할머니가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로 찾아왔다.
“제 인생은 열여섯에 끝났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건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왜 없다고 합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했다. 16세에 중국에서 양언니와 함께 일본군에 끌려가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을 당하고 빨간 벽돌집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당국이 시종일관 증거가 없다며 발뺌해온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1991년 8월 14일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당국과 일본군이 저지른 성노예 만행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증언하신 날이다.

참고문헌 : 역사e (EBS, 국사편찬위원회) 북하우스

사족

1.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기리기 위해 정신대 협회를 주축으로 '기림의 날'이 만들어져서 매년 8월14일 기념 행사를 한다.
'기림의 날'은 2017년 12월 12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 통과되면서 2018년부터 매년 8월 14일이 정부 지정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2.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후 1992년 1월 부터 매주 수요일 '수요집회'가 열린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그 부당함을 규탄하기 위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지난 8월 10일 1,556차가 되었다.

3. 김학순할머니는 1997년 12월16일 타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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