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서울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이 해체 되고, 돈을 벌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들었다.
문제는 이렇게 상경한 이주민들이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불법으로 판자촌을 지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서울시와 이주민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서울시는 철거민 대책으로 대규모 이주정책을 입안했고, 이를 위해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일대)를 이주민들의 정착지로 결정했다.
서울시가 이주민들에게 내건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한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원에 분양하는 조건이었고, 상환은 입주 후 3년후부터 분할상환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주민들은 너도 나도 신청서를 작성했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도 날인했다.
서울근교에 집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주민들의 신청이 몰렸고, 신청자는 1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1969년 9월1일부터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단지만 조성된 땅에 기반시설은 하나도 조성되어있지 않았다.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당장 집을 지을 자재도 없는 땅에서 주민들은 당장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천막에서 생활을 해야 했고, 당장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도 구할 수가 없었다.
일자리를 얻기위해 서울로 가기위해서는 하루에 6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야했고, 광주를 출발한 버스가 을지로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애초에 서울시는 경기도로부터 평당 4백원씩에 광주대단지를 사들여 개발한 뒤, 오른 땅값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등의 방식으로 서울의 위성도시를 완성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개발계획이 수립되어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일단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 했던 것이었다.
1971년 국회의원선거가 끝나고 난 6월,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토지대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한다. 평당 2천원을 약속받고 이주한 주민들에게 발부된 고지서에는 적은곳은 평당 8천원, 비싼곳은 평당 1만6천원에 해당하는 금액이 적혀있었고, 일시불로 7월말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6개월이하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경고도 붙어있었다. 공무원의 월급이 1만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땅값의 상승이유는 투기열풍 때문이었다. 강남개발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강남과 멀지 않은 광주대단지의 개발기대감이 상승하자 투기꾼들이 몰려들었고, 투기꾼들은 가난한 이주민들의 분양권을 3천원이나 4천원을 주고 매입하기 시작했다. 땅값의 상승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이주민들에게 싸게 나누어 주기로 한 가격을 대폭 올려버린 것이다.
분노한 주민들은 7월 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평당 가격을 1500원 이하로 내릴 것, 10년간 분할상환하게 할 것,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오히려 평당가격을 8천원에서 1만2천원으로 올려버렸고, 대책위의 시정조치 요구에 서울시, 경기도, 내무부등 누구도 답변하지 않았다.
대책위원회는 투쟁위원회가 되었고,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주민 전체가 결의하였다.
주민들이 시위를 위해 성남출장소 앞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 숫자는 5만명을 넘어섰다.
11시까지 면담을 위해 오기로 한 서울시장 양택식이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성난 군중들이 성남출장소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고, 관공서를 파괴·방화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기동경비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했고, 차량을 이용한 서울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폭력이 동반된 시위는 6시간동안 계속되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오후 5시, 내무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으로 파견해 이주민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기로 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 현장에 도착한 양택식 서울특별시장과 주민 대표의 면담은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고, 서울시장도 결국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8월 12일, 서울시장 양택식은 방송 담화로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하고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진 해산, 소요는 3일 만에 최종 진정되었다. 이후 공장설립과 상하수도 건설 등의 추가 조치도 실시됨으로써 주민들의 투쟁은 마무리 된다.
1971년 8월10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빈민운동인 ‘8.10 성남 민권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사족
최근까지 '광주대단지사건'이라고 불리던 명칭을 2021년 3월 성남시에서 공식적으로 '8.10 성남 민권운동'으로 변경했다.
*여러분의 공감과 구독은 블로그 운영에 큰 힘이 됩니다.
'역사속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12일 - 금융실명제,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시행되다. (0) | 2022.08.12 |
---|---|
8월11일 - 아시아의 물개,조오련, 대한해협을 건너다. (0) | 2022.08.11 |
8월9일 - 손기정, 남승룡 베를림올림픽 마라톤에서 메달을 획득하다. (2) | 2022.08.09 |
8월8일 -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4) | 2022.08.08 |
8월7일 - 대전엑스포 93이 개최되다. (0) | 2022.08.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