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4월 27일에 치뤄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표 차이로 아쉽게 패했다. 이 때부터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였고 선거 후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김대중은 교통사고와 지병의 치료를 위해 일본을 드나들었는데 1972년 10월11일 치료차 일본에 가서 머물던 중 10월17일 비상계엄과 함께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하지 않고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유신선포 직후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하였고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조직하고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 한다.
한민통의 일본지부 설립을 위해 미국에서 돌아와 일본에 입국한 김대중은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 유신집회 참가를 앞두고 8월 7일에 도쿄 팰리스 호텔 501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8월 8일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1호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난 오후 1시 경 대화가 끝나고 방을 나오던 도중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을 잃은 상태로 납치되었다.
납치된 김대중은 오사카나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지고 눈과 입이 테이프 등으로 막혀진 채 다시 차에 태워져 1시간가량 달려 어딘지 모를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져 30~40분 항해한 뒤, 공작선 용금호에 실려진다.
김대중을 넘겨받은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급히 출항한 뒤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가서 몸을 새롭게 묶기 시작했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으며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대중은 "발은 밧줄로 양쪽을 묶어서 당기려고 해도 끄떡도 않았다. 바다에 던질 계획을 하는데 솜이불을 붙여야 안 떠오른다고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도 하더라"라고 2009년 발간된 본인의 자서전 ‘나의삶, 나의길’에서 증언했다.
김대중이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왔다. ‘그것이 알고싶다’의 주장에 따르면 이날의 추격은 김대중이 납치된 사실을 인지한 미국 CIA가 일본정부에 요청하고 일본정부가 해상자위대를 통해 실행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CIA한국 지부도 지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 것을 경고했다고 한다.
추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용금호에 전화한통이 걸려온다. 통화가 끝난 후 김대중은 결박이 풀리게 되고 더 이상 김대중을 살해할 여지가 없어진 용금호는 국내로 들어와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앞에 풀어주게 된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15분경이었다.
1973년 8월8일은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인 김대중이 반 유신투쟁도중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된 날이다.
사족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 때문에 대일 관계에서 일본에게 끌려다니게 된 박정희 정권은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 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라고 사과하고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는등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관계가 역전된 것은 그 다음해인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영부인인 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에게 저격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다.
*여러분의 공감과 구독은 블로그 운영에 큰 힘이 됩니다.
'역사속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10일 - 광주대단지사건(8.10 성남 민권운동)이 일어나다. (4) | 2022.08.10 |
---|---|
8월9일 - 손기정, 남승룡 베를림올림픽 마라톤에서 메달을 획득하다. (2) | 2022.08.09 |
8월7일 - 대전엑스포 93이 개최되다. (0) | 2022.08.07 |
8월6일 -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다. (0) | 2022.08.06 |
8월5일 - 국민예능 1박2일의 시작 (6) | 2022.08.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