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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6월26일 - 위대한 민족지도자, 흉탄에 쓰러지다.

by 죽은척하기 2022. 6. 26.

김구선생 장례식 (사진출처 : 한국독립동지회)

 

1949626일 서울 경교장.

백범은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 시각 경교장에 백범을 알현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 안두희.

안두희는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했다.

먼저 방문한 손님이 나간 후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그대로 백범이 있는 서재로 안내했다.

 

이 때 백범은 글씨를 쓰던 중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보고를 받게 되고 백범은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말한다.

잠시 후 안두희가 들어와 백범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이 먹물을 갈아도 되겠냐고 묻고, 백범이 대답하려고 안두희의 모습을 보는 순간 권총을 꺼내들어 백범을 향해 총을 발포한다.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달려가 보니 백범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 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백범이 남북 협상을 통해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참다 못해 백범을 죽였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수감된지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군에 복귀했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란듯이 안두희의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켜 버렸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1961417'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백범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을 당하며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하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

 

1993년에 국회 법사위가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해당 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1996년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두들겨 맞고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으며, 당사자인 안두희도 사망하게 되면서 풀리지 않은 의문의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1949626일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선생이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날이다.

 

사족

 

경교장은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 건물 뒷면에 강북삼성병원 본관을 붙여 건축하면서 오랜 기간 병원 현관으로 사용되었다.

 

당초 20014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613일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건물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옛 집무실을 삼성에서 김구 기념실로 운영하기도 했다.

 

2009814일에는 60년 만에 경교장 전체를 복원하기로 하여, 건물 내에 있던 병원 시설들을 모두 옮기고 201332일 개관했다.

 

일반인 관람이 가능하다.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강북삼성병원 내)

관람시간 : 09:00 ~ 18:00 (자유관람)  (1월1일과 매주월요일은 휴관)

요금 : 무료

교통 : 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 도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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