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40분.
북한의 전면적인 기습 남침이 시작되었다.
50년 6월 현재 북한은 13만 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소련제 탱크 240여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던 반면 남한군은 6만5천명의 정규군, 해양경찰대 4천여명에 정찰기 6대, 바주카포와 화포가 전부였다. 탱크와 기갑차량은 전무했다.
북한의 남침 위협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6월10일부로 일선 사단장들의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6월24일 육군 정보국이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 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했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날 저녁 육군본부 낙성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어 밤새 술판과 춤판이 벌어졌다. 그 파티는 새벽2시, 그러니까 남침 2시간 전까지 이어졌다. (채명신 - 사선을 넘고넘어 : 채명신 회고록)
포탄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지만 서울시민들은 그렇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전부터 38선에서는 워낙 소규모의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전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 해 왔다는 소식만을 간단히 전했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며 "장병들은 신속히 원대 복귀하라."는 공지방송을 반복하자 시민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국군 수뇌부도 전혀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5일 오후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것 같다. 충분히 격퇴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안용현 - 한국전쟁비사1)
1950년 6월25일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6.25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사족
1. 6.25전쟁은 전형적인 '톱질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 왔다갔다 하며 점령과 후퇴가 반복 되었고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 하면서 민간인들은 "누구를 지지하는가?"라는 질문과 선택을 강요 받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학살 당했다.
학살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웠고 그 증오는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빨갱이'라는 혐오의 단어로 남아있다.
2. 공식적인 전쟁의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이지만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통용된다.
'한국전쟁' 이라는 명칭은 1981년 출간된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Korean War)'의 번역판이 1986년 국내에 소개되면서 통용되었다.
중국에서는 2012년까지 '항미원조전쟁'으로 불리다가 2013년 '조선전쟁'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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