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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의 힘
역사속 오늘

[역사속 오늘] 8월23일 - 실미도사건

by 죽은척하기 2022. 8. 23.

자폭으로 사건이 끝난후 버스의 모습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대통령의 암살을 위해 청와대 500m 앞까지 침투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밤 박정희는 보복을 위해 북한을 공격하겠다고 미국 대사 윌리엄 포터를 불렀지만 포터의 반응은 냉담했다. "북을 공격하려거든 각하 혼자 하십시오."

이틀 후인 1월23일 우리나라 동해상에서 미국 첩보함 푸에블루호가 북한에 나포되어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무원은 모두 83명이었고, 나포과정의 교전중 1명이 사망하여 82명이 북한으로 끌려갔다.
가을에 있을 선거를 앞두고 있던 존슨 행정부는 이 문제를 적극 해결해야했다.
핵잠수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원산앞바다 근처로 출동했고, 핵 항공모함 2대가 추가배치 되었으며, 오키나와에 있던 공군 전투기 361대가 남한으로 전진배치 되었다.

자신이 암살 당할뻔한 김신조사건과 푸에블루호 피납사건을 대하는 미국의 온도차에 박정희 대통령은 분노했다.
미국은 박정희가 혹시라도 돌발행동을 할까봐 특사를 파견해 1억달러의 추가군사원조와, M16소총 제조공장의 건설등을 선물로 내놓으며 박정희를 달랬다.
이 같은 대통령의 분노를 인지한 박정희의 수족들이 충성을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보복을 위해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하는 특작부대를 만들었고, 공군산하 특수부대인 684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중에 만들어진 영화나 소설에서는 구성원들이 범죄자나 사형수등으로 묘사 되었지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상은 사회 하층민에 속해 있거나 어려운 형편의 젊은이들이 모집책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원한 것이었다.
모집책들이 이들에게 제시한 조건은 월급 600달러, 6개월의 훈련기간 종료시 소위임관, 제대 후 미군부대등에 취업알선등 이었고, 교사월급이 1만원을 넘지 않던 시절에 국가가 내거는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믿은 사람들은 국가기밀이라는 모집책들의 말에 가족과 연락도 하지 못한채 실미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훈련은 고됐고 처우는 점점 열악해져 갔다. 쌀밥에 고깃국은 처음 한달뿐이었다. 부식은 점점 형편없어졌고, 배급량은 줄어들었다. 이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고 증언에 따르면 몇몇은 과도한 폭행으로 사망에 이르러 그 시신을 임의 처분해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 약속한 6개월은 이미 지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데탕트무드에 휩싸였다. 남북관계도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는등 화해무드로 돌아섰고, 처음 부대창설에 적극적이던 중앙정보부장도 김형욱에서 김계원, 이후락으로 교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은 줄어들었고, 이들의 존재도 잊혀져갔다.
이들에게 편성되는 예산은 유지되었으나 잊혀져가는 존재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었다. 위에서의 횡령이 심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점점 형편없어졌고, 외딴섬에 갇힌 인간병기들은 불만이 쌓여만갔다.
이들에 대한 존재가 부담스러워진 일부에서 이들을 모두 몰살시켜버리자는 의견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부대원들은 1971년 8월23일 박정희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짓기위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완전무장한 상태로 섬을 빠져나와 버스를 탈취, 청와대로 향했다.

처음 이들이 해안초소 근무자에게 발견되어 보고된것이 12시 10분이었고 이들이 버스를 탈취한것이 12시 56분이었으나 보고를 받고 출동대기한 군인들과의 총격전으로 탈취한 버스가 움직일수 없게 되자 다른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청와대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대방동 유한양행 앞길에는 다수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고, 버스는 진입하자마자 포위되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포위망을 돌파 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이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했고 대부분 그자리에서 사망했다.

참혹한 버스내부 (사진출처: 중앙일보 중앙포토)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4명은 국회의 청문회에 출석하여 진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고,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이듬해 총살당한다.

1971년 8월23일은 국가권력의 기만으로 불법징집되었던 젊은이 25명이 억울한 사정을 알리려 청와대로 향하다 산화한 실미도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사족

1. 이날의 일로 군인16명, 경찰2명이 순직했고, 684부대원 25명이 전원 사망했으며 애꿎은 민간인 6명이 돌아가셨다.

2. 당시에는 대부분 실미도 사건을 북한무장공비침투나 군범죄자들의 난동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1999년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출판 되고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어 최초로 천만관객을 돌파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 후 '그것이 알고싶다' 등에서 다루어지면서 일부라도 진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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