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초여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변두리 극장에 홀로 앉아 넋을 놓고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웅본색. 영어제목은 A BETTER TOMORROW.
당시는 이름도 생소했던 주윤발과 적룡, 그리고 장국영이 나오는 그 영화는 그때까지 내가 낄낄거리며 보아오던 성룡의 코믹무술영화와는 거리가 먼, 서양인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않는 우월한 기럭지의 사내들이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를 떨쳐입고 의리와 배신의 총격전을 치르는 갱스터 무비였다.
그들은 갱이었지만 인간적이었고, 가족과 친구를 사랑했으며 배신당한 친구를 대신해 목숨을 건 복수를 감행하는 의리있는 사나이들이었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위험에 빠진 친구와 그 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을 구하러 와서는 “네 형은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용기가 있는데 너는 왜 그 형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느냐.”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다가 기관총을 맞고 산화하는 신화적 인물들이었다.
1류 개봉관이 아닌 변두리의 개봉관에서 상영되었던 ‘영웅본색’은 청소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온 대한민국 영화계와 광고계를 뒤흔들 만큼 홍콩 느와르 영화의 붐을 일으킨다.
서울의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1류 개봉관들은 언제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주무대 였고, 산딸기니 빨간앵두니 하는 과일시리즈와 말을 그토록 사랑하는 부인들의 살색향연이 주류를 이루던 국산영화들은 주로 변두리에서 500원에 두 개의 영화를 틀어주던 소위 3류극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웅본색은 어찌보면 2류 개봉관정도 되는 극장들에서 상영되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초대박을 친 히트 상품이었고 영화에 출연한 주윤발은 남학생들에게, 여리한 모습의 장국영은 여학생들에게 새롭게 떠오른 스타였다.
재개봉 관에서의 N차 관람이 이어졌고, 청소년들은 열광 했다. 주윤발은 그들의 신이었고 극장은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신전이었다.
같은 갱스터 영화지만 헐리우드영화가 차가운 배신과 냉철한 복수의 이야기라면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홍콩느와르는 뜨거운 의리에 관한 이야기다.
십대의 청소년에게 ‘친구들과의 의리’는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였고 주윤발의 산화로 만들어진 ‘의리’의 이미지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선 영웅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지금 어쩌다 한번씩 다시 볼 기회가 생겨 다시 보면 그때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보지 못했던 허술한 이야기 구조와 억지스런 컨셉, 그리고 아무리 쏘아대도 떨어지지 않는 총알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청소년기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영웅본색은 언제나 나의 ‘인생영화’목록에 상위권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사족
요즘같은 무더위에 드는 생각 하나.
아무리 폼에죽고 폼에사는 갱스터들이라지만 도대체 홍콩같이 덥고 습한 나라에서 롱코트가 왠말인가? 그들이 총에 맞아 죽지 않았으면 아마 더워서 쪄죽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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