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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7월19일 - 몽양 여운형 암살.

by 죽은척하기 2022. 7. 19.
몽양 여운형.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운동은 끝났다.


해방 3일 후인 1945년 8월18일 부터 테러를 당하기 시작하여 2년간 10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11번째 테러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는 결사대를 뽑았다. 당시 18세이던 한지근이 선발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오후1시경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한지근은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했다.

여운형이 피격되어 절명한 혜화동 로터리(화살표가 피격지점이다)

1907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받아 독립운동에 헌신, 1923년 임정을 떠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부 차장을 지내는등 임정요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국내로 돌아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조선체육회 회장을 지내며 건국동맹등의 독립운동조직을 만들어 1945년 해방 되기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치안유지등의 활동을 했다.
8.15해방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날까지 '건국준비위원회'에 모든 권한을 넘기기로 한 일본 조선총독부가 미국이 입국한 뒤 그 약속을 어기고 모든 권한을 미군정에 넘긴 후 다시 미군정의 파트너로 남아 친일세력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려 하자 그에 반대하여 1946년 부터 안재홍, 김규식등과 통일임시정부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좌익과 우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위해 극단으로 치닫는 시기였고, 그래서 여운형은 좌, 우 양측 모두로부터 테러의 위협을 받고, 실제 10차례의테러를 당하기도 한 것이다.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에 따르면,
"1947년 7월의 시점에서 미국입장에서 볼 때 여운형은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히 들어서고 있었고, 한국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입장에서 모든 한반도 문제에 좌익의 입장도 들으려고 하는 여운형은 오히려 자신들의 주도권 장악에 걸림돌이 된다고 느껴졌을 것이고, 여운형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방관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결국,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활동정지에 들어갔고,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원회는 활동을 시작한지 1년5개월 만인 1947년 12월6일 공식 해제 되었다.
여운형의 꿈이던 '하나의 민주공화국 수립'은 정말 꿈처럼 사라져갔다.
여운형 암살 후 김구 선생이 김규식 선생과 북한을 방문해 남북연석회의를 열게 되지만 그건 이미 한반도의 국토분단과 분단정권 수립이 목전에 도달한 시기에 시도된 마지막 통일시도였다.

여운형선생 장례식 (60만 인파가 모였다.)

사족

1. 1947년 여름은 해방정국을 강타했던 테러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7월 한달 동안 모두 128건의테러가 발생하여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로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당했다.
좌익과 우익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헤게모니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죽이거나 폭행했다.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삼키던 시대였다.

2.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만일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었고 여운형이 집권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3. 참고자료 :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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