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3개월 후인 1896년 7월2일 서재필의 주도하에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 자강혁신, 자유민권’의 세 가지 목표를 내걸고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독립 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1884년 스무살의 나이에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하였다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1890년 6월19일 조선사람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창립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독립협회 활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고문으로서 조언하는 역할만을 했다. 아마도 그가 미국국적을 가진데다가 실생활에서는 십여년이 넘도록 미국인 ‘필립 서’로 행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독립협회가 생긴 목적은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미 파괴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그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서 였다.
놀랍게도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훗날 친일파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이완용이다.
흔히 ‘독립’이라는 단어 때문에 막연히 ‘독립운동’과 연관 지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때는 조선이 외세의 간섭을 받고 있기는 했어도 엄연히 독립국가 였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서의 ‘독립’은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이나 청나라의 사신이 오면 왕이 직접 나가 알현하던 상징이 되는 ‘영은문’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어 조선은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명확히 하자는 뜻이었다.
독립협회는 개화파의 주도로 설립 되었는데 독립신문을 통해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시키는 역할을 주로 하다가 만민공동회등을 개최하여 일반백성의 정치참여를 도모하는 등 정치세력화 하기도 한다. 이에 불안을 느낀 황제파와 수구세력은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대항 하였고 “독립협회 인사들이 황제를 폐하고 공화정을 시행하려고 한다.”고 무고하여 독립협회의 간부들을 체포하고 고종이 독립협회를 해산 할 것을 명령하면서 결국 1899년 12월에 해산되고 만다.
1896년 7월2일은 ‘자주, 자강, 자유’의 목표를 내걸고 조선의 개화를 이끈 독립협회가 창립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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