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환태평양조산대에 속해있는 지역이다.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다.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 1855년과 1894년, 그리고 1922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다.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진도7.9의 강진이 발생해 14만여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채가 전파, 혹은 소실되었다. 이 정도의 대지진은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일본에서도 처음 경험하는 크기였고 피해의 크기도 어마어마 했다.
지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틀에 걸쳐 진도 6.0이상의 여진이 15차례나 발생 했다. 계속되는 지진에 사람들은 패닉상태에 빠졌고 폭동을 우려한 일본정부는 계엄령을 내렸다.
일본정부는 계엄령을 내리면서 각급 경찰서에 테러와 폭동에 대비하라는 문건을 하달 했는데 하달한 문서에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내란과 테러를 획책하고 있으니 특별히 주의 하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 문서를 취득한 신문사들이 기사의 내용을 확대, 인용하면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죽질을 하고 불을지른다.' 라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현혹된 일본인들은 도시 빈민들로 구성된 자경단을 중심으로 '조선인'사냥에 나섰는데 당시 도쿄 일대에 살던 조선인 3만명 가운데 6천여명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했다.
유언비어의 유포는 단지 사람들과 자경단에 의해서 유포된 것이 아니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각 기관에 하달하는 공문에 조선인을 경계하고 유사시 적당한 방법을 강구 할것등의 내용을 실어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사실상 허가했고 심지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조선인을 자경단에게 내주어 학살하도록 용인한 사례도 있었음이 보고 되기도 했다.
흥분한 시민들의 폭동의 대상이 일본정부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일본정부는 그 희생양으로 조선인을 택한 것이었다.
1923년 9월1일은 일본의 간토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14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유언비어로 인해 조선인 6천여명이 무참히 학살 당한 날이다.
사족
대다수의 문헌이나 자료에는 간토대학살 당시 살해당한 조선인의 수가 대략은 6천여명, 구체적으로는 6,661명으로 기록되어있지만 2013년 원광대학교 사학과 강효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희생자의 수는 23,058명이라고 한다.
강효숙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6,661명이라는 숫자는 중국 상하이 거주 조선인 조사단이 1923년 11월28일까지 집계한 숫자이며, 강효숙 박사가 찾은 독일외무부의 자료는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924년 3월에 작성된 최종확인 숫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일본정부는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없었고, 우리 역시 무참히 희생당하신 분들의 숫자도 특정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99년전 먼 타국땅에서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끔찍하게 희생 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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