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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의 힘
역사속 오늘

8월6일 -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다.

by 죽은척하기 2022. 8. 6.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

2차 세계 대전 도중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1939년 레오 실라르드가 주장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쓴 편지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 처음엔 자그마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했으나 연구인원 13만 명 규모까지 성장했고,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로 현재 기준의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약 30조원의 거액이 들어간 프로젝트이다. 오펜하이머를 시작으로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 최고의 두뇌들이 모두 여기에 동원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이 프로젝트를 허가했고, 루스벨트 사망 후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이 프로젝트를 알자마자 최대한 빨리 핵폭탄 개발을 완료할 것을 촉구했으며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예산이 무한정 지원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힘을 가진 핵분열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이 프로젝트는 1945716일 뉴멕시코주 알라모의 폭격연습장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마무리 되면서 종료되었다.

 

1945, 전세가 연합군쪽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을 무렵 미국은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자국의 군인들이 큰 희생을 치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종결을 요구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해 보였고,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를 낭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이 점점 커져 가고 있을 무렵, 미국의 주도하에 포츠담 회담이 열리게 되고 이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에 항복을 권유하지만 일본은 일억옥쇄를 부르짖으며 결사항전을 다짐한다. , 결과적으로 일본은 화를 자처한 셈이 되는 것이다.

 

핵폭탄의 투하에 대한 논의는 태평양전선에서 오키나와 전투가 한창이던 19454월 정도부터 본격화 되었다. 이 때는 이미 일본본토에 대한 공습이 이어지고 있었던 때이고 그래서 목표로 삼을 만한 도쿄, 오사카, 나고야등의 대도시는 이미 잿더미로 변해버려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목표선정위원회는 남은 대도시중 히로시마를 원자폭탄 투하지역으로 선정하게 된다.

 

194586일 오전 8, 히로시마 상공에 3대의 B-29(콜사인: 에놀라 게이, 그레이트 아티스트, 빅터91)가 나타났다.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은 공습에 이미 무뎌진 듯 일상적인 아침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놀라 게이의 페러비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투하 스위치를 눌렀다. 항법사가 비행일지에 기록한 정확한 투하 시각은 194586일 오전 81515였다.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으며, 빅터 91은 히로시마 외곽 상공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선회하고 있었다. 투하 직후 에놀라 게이는 우로,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좌로 급선회,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8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194586일은 인류가 지금까지 사용한 무기중 가장 강력하고 잔혹한 무기인 원자폭탄이 실전에 사용된 날이다.

 

사족

 

1. 당시 히로시마의 전체 인구수는 약 350,000명이었는데 폭탄이 터진 순간 즉사한 사망자의 수가 약 70,000, 1945년 말까지 원폭피해로 사망한 사람은 최소 90,000명에서 166,000명으로 추산된다. 추산인 이유는 당시 히로시마가 전소 되면서 기록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체 사망자중 조선인이 30,000여명으로 추정되며 당시 히로시마에서 일본군 중좌로 복무중이던 대한제국의 이우 왕자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에서 암과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들 중 9%가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2.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적극적인 항복표시를 하지 않았고, 일부 군수뇌부가 결사항전을 외치는 등 삐걱대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89일 나가사키에 한번 더 원자폭탄을 맞고 나서야 항복을 선언하면서 태평양전쟁의 막이 내린다.

 

3.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된 모습을 지켜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것에 대해 평생을 후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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