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일을 문제삼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송병준 등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다.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연일 발생하고 대한제국군의 병사들도 시위에 동조하면서 대한제국군의 항일봉기가 전군으로 확대될 것을 염려한 일본이 대한제국군의 해산을 결정한다.
이미 순종이 왕에 오른 1907년 7월19일 논의를 시작해 7월 24일에 체결된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이 국방분야를 통감부와 일본군에 위임하기로 한 것이다.
대한제국군의 병사들이 반발 할 것을 염려한 일본은 우선 대한제국군 병사들에게 금족령을 발령하고 중화기들을 보관하던 용산 육군병기창을 점령하여 화포와 기관총등의 병기류를 일본군의 관리하에 두도록 하고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사병들에게는 신형 총기 및 탄약을 추가보급해 놓은 후 7월 31일밤 순종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발령과 국방 및 병무분야를 통감부와 일본에게 인계할 것을 요청한다.
8월1 아침7시에 서울에 있는 대한제국군의 모든 지휘관을 소집한 병무대신 이병무가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서를 낭독한다. 이에 격분한 참령 박승환이 자결하고, 일부 지휘관은 8시30분 자신들에게 소속된 병사들과 함께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를 되찾은 후 이를 저지하던 일본군과 시가전에 돌입한다. (남대문 전투로 불리우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에도 이 전투가 소개된다.)
사병들의 저항을 막기위해 도수체조를 핑계로 병사들을 비무장 상태로 아침 10시까지 훈련원에 집결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이미 병사들은 일본군의 흉계를 인지하고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이날 해산대상 군인의 수는 3,441명이었으나 훈련원에 모인 군인이 수는 1.812명으로 절반이 조금 넘는 숫자였고 시가전으로 인한 총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일본군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다고 판단, 훈련원에 모인 소수인원만으로 해산식을 강행한다. 영문을 모른채 모인 병사들은 그제서야 사실을 깨달았지만 비무장상태인 데다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에게 둘러싸여 속수무책으로 강제해산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가전에서도 대한제국군이 분투하였으나 엄청난 화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68명의 사망자와 1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며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은 9월 3일 북청진위대의 해산을 마지막으로 모두 마무리 된다.
1907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의 군대 대한제국군이 해산되며 실질적인 망국의 길로 들어선 날이다.
사족
1. 순종이 내렸다는 해산에 대한 조칙은 훗날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2.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합류하면서 의병활동지역이 확대 되었고, 전투기술이 향상되어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 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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